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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밀레 하우스 아틀리에 박물관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çois Millet 1814~1875, 프랑스)가 1849년부터 죽을 때까지 25년간을 가난하게 살았던 밀레 하우스 아틀리에Maison et Atleir de Jean Francois Mille 박물관은 파리에서 60 킬로 밖에 떨어지지 않은 근교인 퐁텐블로 숲 근처에 있다. 거기서 전원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던 밀레의 마지막 이야기를 공개한다.


고흐와 밀레의 관계

고흐는 초기에 밀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흐의 작품 중에는 밀레의 모작이라고 할 정도로 테마와 구도가 비슷한 그림이 있다. 예를 들면 밀레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한낮의 휴식’과 ‘씨 뿌리는 사람’이 그런 그림들이다.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고흐의 편지에는 밀레의 이름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고흐는 ‘나에게 있어 밀레는 진정한 현대 화가이며, 바로 밀레 덕분에 우리 앞에 지평이 열렸다’라고까지 숭모했다.


고흐가 밀레 작품을 모방했다고 하는 말도 있다. 정말 극도로 무지의 소치다. 그렇게 화풍을 따르는 일을 모방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밀레는 풍경화를 넘어 인물화를 완성한 화가다. 특정인을 그리는 초상화가 아닌 인물화 말이다. 농부를 그렸지 한 사람의 농부를 그리지 않았다. 그래서 밀레의 인물화에 나오는 인물은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다. 특정인의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농부일 뿐이다.


당시 일반인들은 성이 없이 이름만 있었다. 이를 상징하듯 밀레 그림의 인물은 정면을 보지 않고 정면을 봐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밀레가 초창기 초상화를 그린 시절을 두고 먹기 살기 위해서 한 일이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틀린 견해이다. 사진이 실용화 되어 세간에서 일상화되기 전까지는 서양 회화에 있어서 초상화는 가장 고상한 장르였다.


그다음으로 고상한 장르가 역사화(혹은 기록화)였다. 초상화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남기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알타미라 동굴화에서 보듯이 원시시대로부터의 인간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본능이었다. 또 왕이나 귀족 같은 권력가들은 자신의 아바타 격으로 초상화를 그려 직접 통치할 수 없는 영지 곳곳에 내려 보냈다.


당시 사람들은 초상화에는 신비한 힘이 있어 초상화가 내려 보고 있으면 배반을 못하리라고 여기기도 했다. 자신의 모습을 후세에 남겨 영원히 남기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 다음이 역사적이거나 종교적인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그림을 이용했다.


초상화와 기록화의 관점

권력가들은 자신의 승전이나 치적 혹은 역사적인 행사들을 후세에 자랑하기 위해서 기록화를 이용했다. 파리 교외 베르사이유 궁전에 전시되어 있는 다비드가 그린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이 대표적인 기록화 작품이다. 결국 지배계층과 권력가들이 필요로 하니 초상화와 기록화가 가장 고상한 장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이 풍경화이고 마지막으로 가장 저급한 장르가 정물화이다.


이 둘은 앞의 두 장르의 배경으로만 취급 받았다. 레오나르도다빈치의 모나리자 배경은 산수화이다. 그 배경 산들이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동양 수묵화에나 등장하는 기암절벽의 산천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렇게 천대받던 풍경화와 정물화가 사진의 등장으로 신세가 역전된다. 인물이나 역사적인 기록을 위해서는 사진보다 더 좋은 매개체가 있을 수 없다.


결국 사진에 의해 초상화와 기록화가 밀려나고 그 자리를 풍경화와 정물화가 차지하게 되었다. 통치를 위해 초상화가 필요 없고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할 일도 없던 신흥 부자들은 돈 자랑을 위한 실내 장식용 유화를 구입할 때는 풍경화와 정물화 보다 더 좋은 장르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개 장르 내의 위계질서가 완전히 역전이 되어 버렸다. 예술품 하면 초상화나 기록화보다는 풍경화나 정물화가 더 귀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대로 된 화가는 초상화를 그리지 않는다는 통념이 생겨나기까지 되어 버렸다. 초상화는 예술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한 수단처럼 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밀레가 초상화를 그리던 때는 아직 사진이 초상화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전이라 초상화를 먹고 살기 위해 그리던 시기는 아니었다. 당시는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초상화가 최고였던 시절이었으니 밀레가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초상화를 그렸다는 말은 현대인들의 시각이다.


밀레가 ‘만종’을 그린 이유

밀레의 대표작이 ‘만종’이라는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만큼 만종은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만일 세상에 존재하는 유화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 3개를 들라고 한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리고 밀레의 만종이 아닐까 한다. 만종이 감자 추수를 한 농부 부부의 평화로운 감사의 기도 장면이 아니라는 세인의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는 주장도 있다.


두 부부 사이에 놓인 바구니는 원래 아이의 관이어서 두 부부의 기도 자세는 감사의 기도가 아니라 죽은 아이를 묻기 전의 슬픈 기도라는 말이다.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처음 한 말이다.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천재라는 달리의 말이니 신빙성이 더 있어서 회자되고 있다. 농부의 아이의 죽음은 너무 사회주의적인 모습이라는 평을 듣고 바꾼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도 그럴듯한 주장이고 세간에서 관심이 높아 루브르 박물관이 엑스레이로 검사해 보니 직사각형의 상자 같은 모양이 밑그림에 있어 그럴 듯해 보였으나 명확하게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사실 밀레는 화구가 항상 모자라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작품에 대한 평이 나쁘면 그림 위에다 덧칠을 해서 다른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기록에는 나오나 오랫동안 존재가 알려지지 않아 없어졌던 그림이 현존하는 다른 그림물감 밑에서 발견되는 사실도 있어 그럴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더군다나 자신은 아니라고 계속 주장했지만 밀레의 그림이 워낙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진해서 오해를 받고 있는 형편이라 아이의 장례를 그린 그림은 너무 심해서 덧칠을 해서 완전히 다른 테마의 그림으로 바꾸었다는 말도 그럴 듯하긴 하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상당히 적다.


왜냐하면 미국인이 바르비종을 우연히 지나다가 주문을 해서 완성을 하고는 밀레는 이 그림 제목을 ‘감자 추수의 감사 기도Prayer for the Potato Crop’라 지었다. 미국인 주문자가 안 찾아가자 결국 밀레는 그림 오른쪽 윗부분 지평선에 성당을 그려 넣고는 이름을 만종이라고 바꾸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기록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만종’의 실체

거기다가 밀레 자신이 ‘내가 만종을 그린 이유는 할머니 때문이다. 우리가 들판에서 일을 하다가 저녁때가 되어 삼종기도의 성당 종소리가 들려오면 언제나 우리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죽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던 일이 생각나서 였다’라고 했으니 아이를 묻기 전의 기도라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바르비종 마을 밖의 들판에 가면 만종을 그린 바로 그 장소에 표지가 서 있다. 거기 지평선에는 만종 그림의 성당 종탑이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저녁 기도에 어울리는 가공의 성당을 그려 넣었다는 말이다. 그림의 두 사람도 보통은 부부라고들 하지만 동료 농부다 남자 주인과 하녀라는 전혀 증명할 수 없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도 있다. 밀레 하우스의 밀레가 아틀리에로 쓰던 첫 번째 방에 가면 만종의 여주인공 74살 마리의 흑백사진이 있다. 마리는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전통의상을 한 전형적인 시골 농부 아낙의 모습이다.


밀레가 만종을 그릴 때는 마리는 17살이었으니 57년 뒤인 1916년에 촬영된 사진이다. 그런데 사실 이 작품의 이름을 만종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 만종()의 한자 뜻은 저녁 종이다. 저녁에 기도하라고 치는 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원래 그림의 이름 ‘Angelus’라는 단어를 가톨릭에서는 ‘삼종기도’라고 한다. 삼종기도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예고한 사건(성모영보)을 기념하여 바치는 기도이다.


전통적으로 성당, 수도원 등에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시 이렇게 하루에 세 번 바치도록 규정되어 있다. 삼종은 종을 세 번 친다는 뜻으로, 이 종소리를 듣고 봉송하는 기도라고 해서 삼종기도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사실 이 그림은 원명대로 ‘삼종기도’라고 불러야 마땅한데 일본인들이 만종이라고 불러서 그렇게 된 듯하다.


세기 최고의 멍청한 선택

사실 만종은 밀레의 그림 중에서 가장 종교적인 작품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래서 19세기에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프린트가 되었던 그림이다. 그래서 구미각국의 어느 가정이나 만종이 집안 어디엔가 걸려 있었다. 한때 한국의 각 가정에도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장식으로 대청마루 벽에서도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거나 마을 이발소에도 항상 걸려 있을 정도의 소위 말하는 ‘이발소 그림’ 중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달리도 어릴 때 언제나 눈 만 뜨면 보았던 그림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저 그림이 다른 뜻이 있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사해서 그런 주장을 내었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밀레는 그런 종교적인 목적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시골 농부들의 단순한 삶을 그리고자 했다. 현재 만종은 이삭 줍는 농부와 함께 오르세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네델란드로까지 팔려 갔던 걸작 만종이 사실 프랑스로 돌아와 루브르를 거쳐 오르세 미술관에 프랑스의 자존심의 하나로 걸리게 되기까지는 몇 개의 행운이 겹쳐서 된 일이다.


그림이 풍기는 너무 강한 가톨릭 종교 성향과 그림 주인이 신교도였다는 두 가지가 프랑스로 봐서는 행운이 된 탓이다. 벨지움 장관이었던 만종 주인은 밀레의 ‘목동과 양 떼들’과 만종을 왜 바꾸냐는 질문에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나? 물론 걸작이 분명 하긴 한데 농부 두 명이 일을 멈추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근처의 성당 종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할 수 있지않나? 그래서 결국 끝도 없이 들리는 종소리에 나도 지쳐 버렸어!’라고 냉랭하게 대답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뭐라고 해도 이 장관은 세기 최고의 멍청한 선택을 한 셈인데 사실 만종은 밀레 손을 떠날 때에도 제값을 못 받았다. 그 후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으나 별로 가격이 오르지 않았다. 결국 밀레 사후 10년 뒤에야 밀레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달라지면서 미국과 유럽 사이에 경쟁이 붙어 1885년 결국 당시 가격으로 80만 프랑스 금화로 거래되었다. 현재 시가로는 거의 10,040,000 달라(113억4520만 원)이다. 엄청난 금액이다.


이를 계기로 추급권Artist Resale Royalty 불어로 droit de suite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결국 프랑스에서는 1920년에 시각예술 작품에 대한 ‘추급권’ 즉 재판매에 대한 권리를 법제화했다. 유럽 국가 국적 작가의 작품이 판매될 때 Secondarymarket sale마다 판매자가 얻게 되는 이익의 일정 부분(대개 3-7% 금액이 올라갈 수록 %가 적어진다)을 일정 기간(작가 생전과 사후 70년간) 동안 작가나 그 유족에게 돌려주는 작가 보호 제도이다. 문학작품들은 판권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시각예술작품에 대한 판권으로 제정되었다. 한국에는 없는 반드시 도입되어야 할 제도이다.


고흐가 밀레를 모사?

사실 밀레를 말할 때 반드시 따라 나오는 화가가 반 고흐이다. 객관적으로 봐서 밀레보다 몇 배는 더 유명한 고흐가 밀레 작품을 모사할 정도로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이 반드시 언급된다. 인류 최고의 화가 중 첫 번째는 아닐지는 몰라도 세 번째 밖으로는 결코 밀려나지 않을 대가인 고흐가 밀레 그림을 그대로 모사했다는 사실은 내용을 잘 모르는 일반인에게는 거의 충격으로 와 닿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 고흐가 밀레 작품을 모사했는가 하는 의문으로 출발한 호기심은 고흐가 그림을 시작하는 시기에 밀레의 ‘만종’을 보고 개안()에 가까운 충격을 받아 밀레 작품을 습작으로 모사했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르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예를 들면 고흐의 걸작 중 하나라고 알려진 ‘석양에 씨 뿌리는 사람’은 놀랍게도 밀레의 것을 모사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고흐는 죽기 2년 전인 1888년 그렸으니 고흐가 밀레 작품을 습작의 수단으로 그렸다는 가설은 말이 안된다. 그때는 이미 고흐가 이때 자신만의 화풍으로 그린 ‘해바라기’와 ‘별이 빛나는 밤’ 등의 희대의 걸작을 그린 때 였으니 습작으로 밀레의 그림을 모사했을 리가 없다. 고흐가 밀레 그림을 모사한 이유는 밀레에 대한 존경 때문이라고 해야 할 듯도 하고 일종의 재미로 했다고 해도 된다.


고흐가 그림을 시작하는 28살이던 1881년은 밀레는 이미 고인이 된 지 6년이나 지난 때였다. 그래서 고흐에게 있어 밀레는 한 번도 모셔 보지 못하고 만나본 적도 없는 멀리서 바라만 본 스승이라 그리움으로 그린 오마주의 한 방법이 아닐까? 물론 나름대로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긴 했으나 누가 봐도 밀레의 그림을 모사한 고흐의 그림은 밀레의 그림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그림은 ‘씨 뿌리는 사람’ 은 거의 한 사람의 다른 시대의 작품이라고 해도 될 만큼 흡사하다. 심지어는 배경까지도 같다. ‘아침 일터로 나가다’ 나 ‘벌목공’ 도 거의 구도나 인물의 포즈까지 같다. ‘오수()’는 그나마 인물이 누운 방향이 다르긴 해도 결국 같은 작품에서 시작된 쌍둥이 작품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결코 누구도 고흐를 비난하지 않는다. 이유는 본인이 굳이 숨기지도 않았고 부끄럽게도 여기지도 않았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하게 닮게 혹은 똑같이 그린 탓으로 비난하는 일이 쑥스러울 정도이다.


고흐의 집착?

고흐가 모사한 밀레 그림은 일일이 다 이름을 거론하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위에서 든 잘 알려진 그림 말고도 ‘양털 깎기’ ‘하루의 끝’ ‘뒤쪽에서 본 밀 베는 사람’ ‘낫으로 밀 베는 사람’ ‘갈고리 쓰는 여인’ ‘밀 짚단을 매는 여인’ ‘짚을 자르는 여인’ 등은 정말 그대로 복사한 듯하다. 그래서 고흐가 목사를 그만두고 화가가되기로 한데는 젊었을 때 본 밀레의 작품이 큰 영향을 미친 탓이라고도 하는데 이도 사실이 아니다.


고흐는 밀레만 모사한 것이 아니다. 고흐는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했다. 예술은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말처럼 모사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간 경우도 있지만 고흐의 경우는 다르다. 고흐가 모사한 시점은 이미 고흐는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여 걸작을 그린 후이다.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한 고흐의 그림은 30여 점인데 그중 21점이 밀레 작품을 모사한 것이다.


이 모든 작품들이 고흐가 정신병이 도져 자신의 발로 걸어 들어 간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있는 겨울 동안 밖이 너무 추워 외출을 못했을 때를 비롯한 1887년에서 1890년까지 3년 사이에 그려졌다. 고흐는 가까운 친구였던 ‘에밀 버나드’ 를 비롯해 ‘비르지니 드몽 브르통’ ‘오뇌르 도미에’ ‘외진 드로크로아’ ‘귀스타브 도뢰’ 등의 작품을 재미로 모사한 듯하다. 심지어는 렘브란트의 작품도 모사했다. 그런 그림들 중에는 고흐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그림들도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도뢰의 작품인 ‘운동하는 죄수들’과 밀레의 ‘석양에 씨 뿌리는 사람’이 그런 작품이다. 이렇게 고흐가 모사한 밀레의 작품들을 모아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과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이 이미 특별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다. 고흐의 초창기 그림들에 등장하는 어두운 분위기는 렘브란트의 영향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바로 밀레의 그림 때문이라고 해도 된다. 예를 들면 고흐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감자 먹는 사람들’의 등불 밑에 모여 앉은 농부 가족의 모습은 밀레의 ‘겨울밤’과 주제만 다를 뿐 분위기가 흡사하다.


고흐의 심리

그렇다면 왜 고흐는 특히 밀레 작품에 심취했을까? 그 답은 고흐의 타고난 반골기질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당시 누구도 그리려 하지 않던 하찮은 농부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밀레를 고흐는 경이의 눈으로 쳐다보게 되었고 존경하고 닮으려고 했다. 당시 화가라면 누구나 그려야 마땅한 영웅이나 신화와 성경이야기를 그리지 않고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농부들과 이름 없는 이웃들의 그림만 그린 두 사람은 당시로는 정말 이단자들이었다.


1873년 밀레의 작품을 본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밀레에 대한 존경을 편지에 써서 보낼 정도였다. 이때가 고흐의 나이 20살 때였으니 아직 그림을 시작하고자 하기도 전이었다. 밀레에 대한 존경은 화가가 아니었을 때 이미 시작된 셈이다. 결국 밀레에 대한 고흐의 존경심은 뛰어난 실력의 그림 때문이 아니라 자신처럼 시대와 타협하지 못하고 모두들 외면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작품에 남긴 선배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유추해 본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비록 시대를 달리했지만 평생 돈에 쪼들리고 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밀레는 그나마 고흐보다는 나은 편이었지만 결코 그도 모네처럼 하인 두고 주방장 몇 명씩 두고 호화판으로는 한 번도 살아 보지 못했다. 바르비종의 밀레 아틀리에는 결코 지베르니의 모네의 호화 주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허름하다. 하긴 마구간을 개조한 모습이 역력해서 고흐가 숨을 거둔 오베르 수아즈의 다락방을 보는 듯 마음이 짠하다.


더군다나 바르비종의 밀레 아틀리에는 사설 기념관이다. 그래서인지 아마추어가 취미로 하는 박물관 같은 냄새가 난다. 그래서 더 정이 가긴 하지만 어렵게 밀레를 기리기 위해 유지해 가는 모습도 사실 짠하다. 언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유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오래오래 이런 소박한 모습으로 유지되길 바라는 내 희망은 너무 이기적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