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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국풍 유럽의 색조와 마카오 여행


동서양의 문화가 동거하며 남긴 흔적은 사무치게 아름답다. 이 도시를 기억하게 만드는 수많은 색깔. 휘황찬란한 카지노의 네온사인 이면에는 원색과 파스텔의 조화가 곱게 담겨 있었다. 마치 보물찾기 하듯 오로지 ‘컬러’를 좇아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마카오의 얘기다.



공존, 마카오를 이해하는 키워드다. 1999년 중국에 반환되기까지 442년간 이어진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는 마카오에 유럽의 모습을 옹골차게 새겨 두었다. 거리, 광장, 건물, 이정표 등 눈길 닿는 풍경마다 아시아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기에 꽉 찬 광동어의 살랑거림처럼 중국적인 면면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치 이곳이 중국의 땅임을 잊지 말라는 듯, 골목을 돌아들 때마다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도교적 관습이 이채롭다. 시대의 섞임도 인상적이다. 익히 알고 있듯 카지노는 마카오의 아이덴티티다. 24시간 불야성을 이루는 카지노들은 실적에서 라스베이거스를 이미 능가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현대적인 오락문화의 끝자락이 진득한 역사의 향기와 맞닿아있다는 점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유적만 해도 30개. 이 도시가 서울의 종로구(23.91Km²)보다 조금 더 큰 면적(26.8Km²)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이렇듯 놀랍도록 모순적인 문화들이 모호한 경계를 이루며 서로 의지하고 있는 곳이 마카오다. 하지만 무엇보다 ‘색조’의 어울림을 기억해 둠이 옳다.



과연 우리 가까이에 이렇게 컬러풀한 도시가 또 있을까 싶다. 핑크, 크림 옐로우, 민트, 레드, 블루 등으로 다양하게 채색된 골목들, 단순히 예쁘다는 표현만으론 너무 뻔해 미안할 정도다. 마카오에 내재된 이런 색감에 매료되어서 ‘사진’만을 목적으로 한달 사이에 두 번을 찾았다.


도보로 만끽하는 유럽풍 색조, 마카오 역사지구

세계문화유산지구로도 불리는 마카오 역사지구는 정형화되었지만 찾기를 주저할 수 없는 루트다. 왜 사람들이 마카오를 가리켜 동양의 유럽이라고 부르는 지, 이곳에서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워낙 볼 것도, 들를 곳도 많아 사진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으로도 최적이다. 여행자마다 동선은 제 각각이지만, 저마다의 장소를 찾아가는 올바른 방법은 도보다. 걷는다는 것은 순수하게 주변을, 날씨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내딛는 걸음마다 날 것으로 호응하는 사물의 본색과 조우하게 된다. 복합적인 문화를 지닌 마카오의 진실한 매력은 작고 부분적인 곳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걷는 것은 마땅하다. 내 도보여행의 시작은 ‘성 라자루 성당 지구Igreja de Lazaro Petro’다. 마카오에서 가장 아름다운 포르투갈 풍의 거리로 소문난 곳이다. 무심한 골목에 예쁜 집들. 알록달록한 원색과 수수한 옐로우 톤이 빚어내는 색감의 조화가 과연 눈부시다. 잠자고 있던 미의식이 꿈틀대는 순간, 아이보리색으로 빛나는 길의 표면을 끌리듯 어루만졌다. 석회석을 네모꼴로 잘라 모자이크처럼 꾸민, 포르투갈의 도로 포장 기법으로 ‘깔싸다Calcada’라고 부른다. 보통 물결, 별, 숫자 등의 무늬를 그려 두거나, 기하학적 형상을 새겨 넣기도 한다. 구 시가지의 바닥이 모두 이런 식인데 걷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건물을 끼고 난 포르투갈 양식의 타일 길을 따라가면 골목과 골목이 이어진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자 홍콩의 뒷골목을 연상하게 만드는 세기말적 풍경이 나타난다.


하지만 심드렁한 홍콩의 그것과는 다르다. 풍경을 쪼개서 보면 하늘색 우편함, 청록색 대문, 민트색 벽면, 레몬색 커튼… 따뜻하고 사람냄새가 난다. 색이 주는 효과가 이렇게나 크다. 많은 기둥과 이국적인 아치를 가진 건물에 시선을 빼앗겼다면 그것은 ‘무어리쉬 배럭Quartel dos Mouros’이다. 로컬들에게는 항무국이라 불린다. 1874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카슈토Cassuto에 의해서 지어졌다. 당시엔 마카오에 거주하던 포르투갈인들을 보호하고 치안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인도에서 파병된 용병들이 거주했다고. 건물이 가진 독특한 느낌도 이 때문이다. 관공서인 탓에 테라스 이외의 내부지역은 출입금지 구역이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마카오를 대표하는 이미지인 ‘성 바울 성당Ruinas de S. Paulo’ 유적은 누구나 들르는 곳이기에 거꾸로 포기할 수 없다. 1644년 완공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성당이자 동양 최초의 유럽식 대학으로 위용을 자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소실된 탓에 지금은 석조로 만든 전면부만 남아있지만, 섬세한 조각상과 우아한 색조는 여전히 눈길을 모은다.


언제나 북적거리는 긴 계단을 오르면 성당까지 닿는다. 우뚝하게 서서 바라보는 마카오 구 시가지의 풍경은 중국인들로 가득한 프레임만 제외한다면, 유럽의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싶다. ‘연애거리Travessa da Paixao-현지어로는 연애항’라는 로맨틱한 이름이 붙은 작은 골목은 예쁜 마카오를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성 바울 성당을 나와 오른편으로 터벅거리다 보면 나온다. 건물 몇 채가 전부인 아담한 규모지만, 감성적인 컬러가 골목에 흘러 넘쳐 여심을 저격한다. 참! 내가 말했던가? 이곳에서 보는 성 바울 성당의 모습도 꽤나 느낌이 좋다는 것을. 마카오에 발을 디뎠다면 누구나 한번은 찾고 보는 ‘세나두 광장Largo do Senado’. 마카오 역사지구 산책의 시작점이 되기도 종점이 되기도 하는 곳이다. 끝없이 연결된 물결무늬 타일과 이국적인 건물들이 빚어내는 하모니, 짧은 거리를 날아왔지만 꼭 먼 곳에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든다. 광장에 스며든 색감 또한 눈부시다. 그리고 중앙에 놓인 분수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의 표정만큼 밝고 다채롭다. 그래서 이곳, 언제 걸어도, 몇 번을 찍어도 새롭기만 하다.


파스텔 톤으로 빛나는 타이파와 콜로안 Taipa&Coloane

뒷골목을 배회해 보는 건 당위성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다. 하지만 타이파 빌리지Taipa Village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귀엽고 예쁜 동네. 지중해풍의 키 낮은 건물들이 풍겨내는 오밀조밀한 분위기가 여행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과거,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 반도의 번잡함을 피해 별장지로 조성한 덕분에 남은 모습이다. 미로처럼 이어진 좁은 통로는 타이파의 현재와 과거를 잇는다. 그리고 결국은 색으로 정리된다. 어귀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풍경, 파스텔 색조를 모두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색의 빨래들과 담장의 벗겨진 페인트에서는 로컬들의 삶의 흔적이 진하게 전해진다. 골목이 주는 효과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꾸미지 않은 평범한 자취들을 껴안고 가는 일 말이다. 조용하기만 했던 산책이 어느 순간 활기찬 소음으로 변한다면 쿠냐거리Rua doCunha에 서 있는 거다. 육포거리로 명성을 떨쳤던 과거는 산뜻한 맛집과 길거리 간식들로 대체되었다.


100m의 거리를 빼곡하게 채운 간판들을 머리에 이고 걸어보는 것, 노란색으로 치장한 이색적인 스타벅스에서 노닥거리는 것, 광장 계단에 걸터앉아 마카오식 버거인 ‘쭈빠빠오’를 우걱우걱하는 것, 어떤 것을 선택해도 이곳에선 즐겁기만 하다. 쿠냐거리의 맞은 편은 오르막으로 향한다. 크게 가파르지 않아 걸음은 가뿐하다. 아기자기한 타이파의 분위기가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바뀌는 길의 끝에 당도하면 다섯 채의 아름다운 주택이 서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타이파의 주택박물관Casa Museu de Taipa이다. 박물관이라고 해서 꼭 무엇을 보고 가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영롱하게 빛나는 민트색의 건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는 것. 그 정도로도 이곳을 택한 대가는 충분히 보상받는 거니까.


타이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콜로안 빌리지Coloane Village는 바다를 끼고 있는 작은 어촌마을이다. 타이파와 비교해 좀 더 조용하고, 좀 더 수수하다. 하지만 고운 색상의 건물들로 가슴이 따뜻해 지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거짓말처럼 한껏 여유로운 주위가 덤으로 주어진다. 드라마 ‘궁’을 추억하게 하는 아름다운 장면들이 대부분 콜로안을 배경으로 한 것도 이런 이유일 테다. 성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성당Igreja de S.Francisco Xavier, 양철소재의 수상가옥들에 배어있는 중독성 강한 컬러는, 이 동네에서 탄생한 마카오 제일의 에그타르트 ‘로드 스토우즈 베이커리Lord Stow’s’ Bakery’의 맛처럼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노란 빛깔로 화사한 콜로안 도서관을 등지고 앉은 오후의 한 때, 무료함을 느낄 정도로 세상이 평화롭다. 돌아 나오는 길, 허름한 문틈 사이로 동네 할아버지 몇이 마작을 하고 있는 모습을 훔쳐 본다. 그들의 어깨 뒤로 익숙한 얼굴들과 의미를 알 수 없는 대사들이 스쳐간다. 중국어로 더빙된 한국드라마다. 주름을 깊게 찡그린 채 패를 보며 생각에 잠긴 노인들, 먼지 냄새, 낡은 TV, 중국인이 되어 버린 한국배우들. 사람냄새가 부쩍 진한 이 순간이 묘하게 정겹다. 그리고 그게 콜로안의 매력이다.


반가워지는 중국풍 유산, 중국의 색

바다의 위험으로부터 어민들을 보호하는 여신인 ‘마조’를 모시는 도교사찰, ‘아마사원Templo de A-Ma’이 특히 그렇다. 오늘날 이 도시가 마카오라고 불리게 된 유래의 주인공이고,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1488년 건립)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붉은 벽과 청록색 지붕, 붉은 초와 노란 향의 강렬한 대비가 소원을 비는 신자들의 간절함만큼이나 인상적이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나선형의 향도 볼거리다. 도교 신앙에선 향을 피우면 소원이 하늘에 닿는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긴 시간 동안 피어 오르는 향을 필요로 했다. 나선형의 향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고, 이를 ‘만수향’이라고 부른다. 속설에 의하면 타고 있는 향의 재를 맞으면 재수가 좋단다. 이를 믿는다면 선택은 아마사원이다. 마카오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원답게 매달린 향의 수도 차원이 다르다. 그렇기에 재를 맞을 확률, 물론 높다.



마카오 역사지구의 오르막길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만다린 하우스Casa do Mandarin’는 ‘로우카우 맨션LouKau Mansion’과 함께 마카오를 대표하는 중국식 저택이다.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인 ‘정관응()’이 이곳에 살았다. 솔직해지자. 별다른 기대를 하고 들른 곳은 아니었다. 꼭 가볼 것을 거듭 강조한 로컬의 당부, 발 도장이나 찍고 오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12동, 60여 개나 되는 방을 가지고 있을 만큼 커다란 규모! 건물의 내, 외부를 막론한 꽉 찬 볼거리에 당황스럽다. 꼼꼼히 찍고, 공들여 보다 보면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흐른다. 하지만 충분히 만족했기 때문에 지나간 시간이 아깝지 않다. 이런 곳을 그 동안 왜 모르고 있었던 걸까?



극과 극은 오히려 통하는 법. 세나두 광장의 바로 맞은 편엔 가장 중국적인 거리가 숨을 쉬고 있다. 붉은 색이 넘쳐 흐르는 거리인 ‘펠리시다데Rua de Felicidade’다. 포르투갈어로 펠리시다데는 행복이나 기쁨을 의미한다. 중국인들에게 붉은 색은 행운과 복을 의미하기에 이름과 분위기가 꼭 맞아 떨어진다. 완벽한 ‘행복의 거리’! 하지만 알고 보면 과거에는 홍등가로 유명했던 곳이다. 펠리시다데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빨간색은 바로 홍등가를 붉게 치장하던 관습의 흔적이다. 사연은 이래도 정말 이름처럼 변해가고 있는 펠리시다데 거리다. 연중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 독특한 분위기를 찾아 추억을 남긴다. 소문난 음식점들도 속속 들어섰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촬영지로도 변신해 존재감을 알렸다. 특히 영화 ‘도둑들’, 당시 화제를 모았던 이 영화의 포스터가 촬영된 장소가 궁금하다면, 당장 마카오행 비행기를 예약하고 펠리시다데로 달려와야 한다.